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3도 창의군 (문단 편집) == 의의 == [[구한말]] 활동한 [[의병]] 중에서도 가장 조직적이고 전국적인 단체였으며, 작전 수행 이전 각국 대사관에 교전권을 인정해달라고 호소하는 격문을 보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20세기 초반 국제 정세 및 [[국제법]]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지식과 현실 감각이 있었다. 물론 이는 딱히 이상할 것도 아니다. 위정척사파는 위정척사파이기는 했지만 정말 극소수를 빼면 배척하긴 했지만 나름대로 번역된 서적 등을 통해 알 것은 알아두었다. 이미 10년도 더 이전에 만국공법을 인용한 위정척사파의 상소가 올라온 적이 있었으니 어느날 갑자기 위정척사파가 확 바뀐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 정도는 알고 있던 것이다. 13도 창의군 관련해서 가장 왜곡된 상식이 [[홍범도]], [[신돌석]] 같은 평민 의병장들을 고루한 봉건주의자 유생들이 배격했다는 설인데 정작 농민 출신 김수남이나 출신 성분이 불분명한 연기우[* 다만 기록이나 정황상 평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가 들어가고 당대에 명성 높았던 유생 의병장 [[이강년]], [[문태수]]는 빠졌다. 신분 문제가 아니라 일본군 수비대, 친일 민병대와 교전하느라 길이 막혀 제때 상경하지 못했을 뿐이다. 예를들어 [[이강년]]의 호좌창의군 부대는 영월, 단양, 청풍, 죽령, 봉기 등 각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싸우느라 정신 없었고 [[신돌석]] 의진은 경북 영양 일월산 방면으로 밀려나 양주에는 가지도 못했다. [[홍범도]]는 주 활동지가 [[삼수갑산]]이라 애초에 합류가 불가능했다. [[이인영(독립운동가)|이인영]]도 거리와 지형상 북쪽 의진 합류는 처음부터 무리라고 생각해 1907년 10월 전국 의진에 통합 의병부대를 조직해 서울로 진격하는 계획을 설명하고 상경을 촉구할때 서북 양도는 제외했다. 창의군 구성을 살펴보면 함경도와 평안도에선 정봉준과 방인관이 각각 80명을 거느리고 합류했을 뿐이다. 애초에 대표적 평민 의병장으로 알려진[* 실제로는 기록에 따르면 중인 출신이다. 다만 출신만 그렇고 실제로 그의 아버지대에 이르러서는 평민과 다를바 없었다고 한다.] 신돌석부터가 간접적으로 고종의 궐기 독려를 받고 거의했으며 퇴계 종가에서 자금 지원을 받았고 휘하에는 양반들도 있었다. 유생 계열이 주가 되었던 것은 맞지만 대규모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재산과 명망을 갖춘게 유생들이니 그런거고 평민 출신이라 그들을 배척했다는 것은 학계에선 수십년전에 사라진 잘못된 인식이다. [[분류:대한제국]][[분류:조선 의병]]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